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 (문단 편집) == 설명 == ||[youtube(v0i0sROQzeo)]|| ||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알쓸범잡 2]] - 5.18 민주화운동 ||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혀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트라우마|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폭동, 당시 매스컴에서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소요사태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다.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한 사건으로, [[지만원]]을 위시한 극우파에서는 [[전두환]]의 주장을 답습하여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확인했고,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해석한다. [[헌법재판소]]는 저항권 행사에 대해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당시 "개별 헌법조항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 아닌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전체적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이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이미 유효한 구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아야"하며, 그 경우에도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회복"을 목표로 해야만 정당성을 지닌다고 판시한 바 있는데(2013헌다1) 이때 광주의 사례가 여기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설령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위법성이 조각된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 現 [[광주광역시]]. 1986년 광주직할시로 승격됐고, 1988년 현재의 [[광산구]]인 광산군과 송정시가 광주에 편입되어 현재의 영역이 완성되었으며, 1995년 광주[[광역시]]로 개칭됐다.]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폭동적 시위진압]] 방식을 고수하였고,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력]] 등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즉결처형|불법처형]]을 하고 [[민간인 학살|민간인을 향해 총기까지 사용하면서까지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 대항했지만 신군부에게 철저히 진압됐다. 덕분에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의 여파가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다시 떠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